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IA 타이거즈/역사 (문단 편집) == [[김성한]] 체제 == ||<-2> '''{{{#ffffff 캐치프레이즈}}}''' || || {{{#ffffff 2001~2003년}}} || '''꿈을 심는 KIA! 용맹스런 Tigers!'''[* 2001년 시즌 중에 팀 운영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신 [[해태 타이거즈]]가 사용하던 캐치프레이즈를 썼고 2003년까지 옛 캐치프레이즈를 활용했다.] || || {{{#ffffff 2004년}}} || '''함께하는 KIA! 도전하는 Tigers!''' ||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두 번 선사하고 해임된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의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덧붙여 지금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로 있는 [[최익성]]이 그날 홈런을 때리며 최익성은 해태를 제외한 KIA 구단 역사상 1호 홈런 타자가 되었다. 그리고 8월 7일에 KIA의 광주에서의 첫 경기 겸 이종범의 광주 복귀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광주 구장의 2001시즌 첫 매진'''[* 참고로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만큼 광주 야구팬들의 KIA에 대한 기대감이 확실히 드러났던 경기였다.]되었다. 2001년 시즌은 유례 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5개 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 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 거릴 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 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와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사실 꼴찌 롯데와의 승차도 겨우 1.5경기차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때쯤에 삼성에서 버려진 선수들이 대거 KIA에 소속되어 있었다. 95년 신인왕 이동수[* 무려 이승엽, 마해영을 제치고 얻은 기록이며, 이때 저 둘도 신인으로써는 범상치 않은 기록을 남겼다.], 97년 20-20을 기록한 최익성과 97년 .326에 이종범과 같은 .581의 장타율의 기록함과 99년 20-20을 기록한 신동주,[* 전성기가 각각 다르지만, 전성기만 따지면 이 셋으로 클린업을 꾸려도 어느 팀에 꿀리지 않을 정도, 게다가 저 셋이 당시 만 나이로 20대후반이어서 20년이 지난 현재로 보면 한창 전성기를 누려야 할 시기다. 2019년도로 따지면 [[안치홍]], [[김선빈]]의 연배였다. 하지만 2001년에는 동기부여의 결여,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해태 특유의 군기문화, 이게 아니라면 당시 부상선수들의 회복시스템이 낙후된 점 등이 작용하여 그들은 다시는 삼성 시절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삼성의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박충식]]까지. 근데 삼성은 2001년 당시 자원이 강했다. 말이 필요없는 이승엽과 99년 .372를 기록했던 [[마해영]]이 3-4번을 받치고 있었고, 20-20을 기록한 마르티네스가 5번타자였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와 3할 20-20을 바라봤던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하며 타격왕에 오른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1983)|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와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이강철]]이 있었다. 4월부터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잠실에서는 두산전 LG전 합쳐 15연승을 거두며 특정 구장 연승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8월 들어 이종범의 안면 사구 사건 등 악재가 생기며 페이스가 꺾이더니 결국 15연승으로 7경기차를 극복한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그야말로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 아시안 게임 종료 후 마지막의 6경기 중 삼성과의 맞대결만 5번 있어 잘 하면 자력으로 역전우승에 도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블헤더로 열린 첫 판을 잡고, 삼성과의 승차를 없앨 수 있던 두 번째 경기도 승리가 눈앞에 왔으나 박충식이 김한수에게 끝내기 역전 홈런을 허용하며 놓친게 뼈아팠다. 결국 나머지 삼성전 3경기를 내리 내주며 2위로 마쳤다. 무엇보다 투수진의 방어율이 전년 5.01에서 3.93으로 급감하였는데 이것은 '''무려 33승+13세이브를 올린 키퍼-리오스 원투펀치의 공이 컸다.''' 문제는 용병타자였는데..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이 지명타자 또는 좌익수로 리그 평균 정도도 못하고 워낙에 민폐를 끼쳤다. 이전년의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산토스]], 아니 이해의 LG의 [[매니 마르티네스]]가 기아에서 뛰면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대신했어도 정규시즌 1위는 KIA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여담으로 정규시즌 78승 4무 51패 중에서 1점차 승리가 무려 '''33회'''로 KBO 역대에서도 최다 순위권으로 많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 이때 KIA 불펜진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선수는 14년차 백전노장 [[이강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리오스를 영입 후 시즌 중반까지 마무리로 기용했으나 그마저도 불안한 피칭으로 인해 선발로 전환하였다.]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11월 1일에 열렸던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 결국 그해 플레이오프에서의 부진 때문에 김진우는 고졸 신인으로 선발로테이션을 돌며 10승과 탈삼진 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왕을 대졸 신인이었던 [[조용준]]에게 내주고 말았다.]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선언,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박재홍(야구)|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손혁]], [[김창희(야구)|김창희]]에 현금 8억까지 얹어 [[두산 베어스]]의 마무리투수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해태 시절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었던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통해 전력을 보강했으며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해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큰 기대와는 다르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지난해에 비해 리오스의 경기력도 떨어졌으며, 지난해 신인 김진우는 폭력시비에 연루되며 징계 및 초반 컨디션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당시 인조잔디였던 대구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또한 마무리투수로 낙점했던 [[진필중]]은 매번 꾸역투에 이따금씩 임팩트 있게 불을 질러 결국 마무리투수에서 내려와야 했다.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당초 마무리에서 좋지 않다가 선발 전환하자마자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8월에 19승을 찍고 11연승 등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며 선두 현대를 턱밑까지 추격했으나 결국 현대에 단 2승차, 승차로는 '''0.5게임 차로''' 2위로 마쳤다. 여담으로 2002~2003년 KIA는 해태 시절에도 못 해본 2년 연속 6할 승률을 기록했다.[* 물론 이것은 2년동안 35승 1무 97패 승률 0.265, 39승 3무 91패 승률 0.3을 기록한 [[8888577]]의 [[롯데 자이언츠|롯데]] 덕분에 승률 인플레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장 2003년 KIA는 그 롯데를 상대로 무려 '''17승 1무 1패'''로 학살했고, 심지어 그 1패마저도 19차전 최종전에서 나온 것이었다.] 흔히 KIA가 2003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KIA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 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정민태]]한테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전반기에 5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승률에서 현대를 앞서기는 했지만, 9월달에도 결국 다승제 기준으로는 현대를 단 하루도 앞서지 못했다. 무승부만 다섯 번 있었던 것이 피해가 된 셈이다.] [[현대 유니콘스/2003년/5월/27일|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 이 경기 초반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야구)|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용]]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06001000/2003/05/006001000200305272320090.html|참고]]] 오히려 막판에는 맹추격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단두대 매치에서의 패배로 2위가 되어 버린 것. 그렇게 직행한 플레이오프에선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무패로 관광보내 버리고 올라온, 신임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돌풍의 팀 [[SK 와이번스]]에 '''0승 3패'''로 가볍게 스윕당하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 몫을 했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 1군 투수코치였던 [[김봉근(야구)|김봉근]] 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이에 SK [[조범현]] 감독이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해간 것. 김봉근이 SK 코치로 옮겨감에 따라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오늘날 유남호, 서정환, 선동열을 겪은 시점에서는 김성한 감독이 욕을 먹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해태 시절에 취해 있던 당시 KIA 팬들은 아무리 페넌트레이스 승률 및 순위가 좋았어도 포스트시즌에서는 힘도 한 번 못써보고 광탈하는 자체를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4년 시즌을 앞두고는 트레이드를 통해 [[두산 베어스]]에서 [[심재학]]을 데려왔고, FA 시장에서 28억을 주고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해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삼성 시절과 다르게 삽질을 거듭했고[* 그나마 KIA에 있는 두 시즌 동안에는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내며 삽질을 하더라도 여차하면 넘어간다라는 인식을 보여주긴 했다. 이후 LG로 이적해선 이 모습도 사라졌으니...],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스윕당한 후 기강을 잡겠다며 선수단 전원에게 국토대장정 훈련을 지시한 것. 이 여파로 인해 2004년 시즌 초부터 KIA는 부상 선수들이 속출하고 말았다. 거기다 권위적인 이미지와 [[김지영]]을 [[김성한 구타 사건|폭행한 사건]] 때문에 감독으로써 김성한의 평가는 현재까지 좋지 못하며, 대부분의 팬들은 김성한이 2004년 이후 다시는 프로 팀 감독으로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게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어수선한 시즌을 보냈고, [[유남호]]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잔여 시즌을 이끌었으며 팀홈런 1위라는 기록으로 대표되는 장타력을 앞세워서[* 당시 두 자릿수 홈런 타자가 심재학, 이종범, 장성호, 홍세완, 마해영, 손지환, 김종국의 7명에 달했으니 그 장타력을 짐작할만 하다.]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감해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전 전패로 탈락했다. KBO 리그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전설의 [[빵 사건]]이 바로 이 해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나온 것. 시즌 후 감독대행이었던 유남호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